반값 대학원생의 디지털 펜촉 대여기록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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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석사 2학년으로 머신러닝 논문을 준비하다가 휴식 시간마다 디지털 드로잉을 즐기는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태블릿 펜의 필압 감도를 시험하며 아이디어 메모를 하곤 하는데, 최근 펜촉 하나가 망가지면서 곤란해졌습니다. 공식 대리점의 정품 교체용 펜촉은 개당 2만 원이 넘었고, 연구비로 사기도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익숙한 중고 장터를 뒤지던 어느 밤, 믿기 어려운 매물을 발견했습니다. 정가 절반 가격인 1만 원에 낱개 판매를 하며 남은 재고가 많으니 미리 확보하라는 글이었습니다. 실습실 라이트가 내리비치는 사진 속 펜촉은 하나도 닳지 않은 듯 선명했고, 게시자는 자신을 디자인랩 조교라고 짧게 소개해 신뢰감을 주었습니다.
대화는 생각보다 매끄러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판매자에게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조교라는 신분이니 배송도 급하지 않겠거니 여겼지만, 답장은 제 상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오늘 저녁까지 입금하면 바로 발송하겠다며 배송비도 본인이 절반 부담하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제 연구 일정이 바쁜 와중이라 굳이 배송비 절반 부담을 제시한 점이 신기했고, 입금 계좌를 받아 곧장 이체 화면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예금주 이름이 성 대신 이니셜 두 자로 표기돼 있어 순간 호흡이 멈추었습니다. 곧이어 판매자는 새벽에도 대응이 가능하다고 알려 오면서, 온라인 강의와 실험 사이를 오가던 제 손목을 더 서두르게 만들었습니다.
사진의 작은 단서가 불안으로 바뀌다
입금을 누르기 전 저는 이미지 파일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폈습니다. 전송된 사진에는 펜촉뿐 아니라 옆에 놓인 스마트폰 화면이 살짝 보였는데, 시간 표시가 새벽 세 시로 찍혀 있었습니다. 연구실이 닫힌 시간대였기에 그 장면이 더 이상하게 다가왔습니다. 펜촉 위에 놓인 작은 메모지에 누군가 삐뚤게 쓴 날짜가 보였지만, 글씨 일부가 잘려 있어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제 의심이 커지자 판매자는 곧바로 “평소에도 새벽에 일하는 편”이라는 짧은 변명을 보냈고, 저는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 없었습니다.
우연히 떠오른 블로그 포스트 한 줄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던 찰나, 먹튀위크라는 사이트가 떠올랐습니다. 과거 항공권 거래 정보를 찾을 때 한두 번 들어갔던 곳이었죠. 스마트폰 브라우저를 열어 계좌 끝 네 자리를 검색하자, 한 달 전 비슷한 피해 사례가 검색 결과 상단에 떴습니다. 게시글엔 ‘펜촉 대여비 반값 선입금 주의’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고, 결제 링크로 유도된 기록과 동일한 이니셜 계좌번호가 확인됐습니다. 사진 속 펜촉 사진은 제 것이 아니라 제품 광고 이미지였고, 피해자는 선입금 후 연락이 두절됐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 하나로 저는 결제 단계에서 스스로 멈출 수 있었습니다.
아직 완전한 안도는 아니지만
그날 밤, 저는 판매자에게 결제 보류 의사를 전하고 거래를 마무리했습니다. 답장은 없었고, 익명 게시글 같던 매물 글이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후속 조치로 저는 같은 사례가 더 있는지 먹튀위크 글을 하나 더 찾아보고, 차분히 다른 구매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결국 최근 오픈한 전문 악세사리 대여 샵에서 정가 8천 원짜리 펜촉을 1회 대여료 3천 원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배송비 포함 비용은 4천 원가량이었지만, 적어도 물건을 직접 받아보고 결제할 수 있어 마음이 놓였습니다.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
환불이나 사과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먹튀검증 사이트 덕분에 다행히 금전적 손해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 밤의 긴장감과 손끝에 얼었던 페이팔 이체 버튼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교훈을 남기자면, 짧은 채팅과 매끄러운 제안이 항상 안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음번 중고 매물을 마주할 때는, 화면 속 작은 메모 한 줄이나 사진 한 장의 그림자가 남긴 의구심에 더 귀 기울이게 될 것 같습니다.